있죠, 나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야.
당신의 그 이기심과 가련함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분노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앞서서 질책해야 할, 그런 사람.
당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던 그 사람을 잡을 권한이 있던 사람.
경찰이라는 이름의 나를 미워하고 있나요?
물론 미워하겠지.
이해도 납득도 안 가는 그런 짓을 한 주제에 당신은 나를 미워할거야.
더불어 나도 당신을 미워합니다. 당신은 경멸스러운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치미는 이 슬픔과 동정심을,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중죄에 무엇을 더 덧붙여야겠냐고. 우린 아마 영원히 모를 거예요.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니까.
◇
“숨 쉬는 것 같아?”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면회실의 공기는 차가웠고, 더불어 제 말에도 독기가 서렸다. 그가 어떤 표정을 했는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기억 할 수 있었던 건, 무겁게 내리던 그날의 차가운 비. 문을 쾅 닫아버리고 건물에서 빠져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온했던 공기도 이윽고 가라앉는다. 가져온 우산을 뽑아 들었다. 펼쳐진 우산 위로 투둑, 투둑, 빗방울이 스쳤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는다. 도시의 소음이 어지러웠다. 차에서 내려 급히 근처 건물로 달려가는 사람들, 우산을 찾아 편의점에 들러 가는 사람들, 비를 맞으며 질주하는 학생들. 우산을 가지고 여유롭게 걷는, 그런 사람들. 분주한 도시. 어둠이 짙게 깔려가는 도시.
◆
그리고 더불어 떠오르는 그의 마지막 모습. 공항에서 차마 주먹을 뻗지 못 하던 그 모습. 눈 앞에서 멎은 주먹이 크고 슬펐다. 차라리 나를 그때 있는 힘껏 때리지 그랬어.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찰박 찰박, 발끝이 조금씩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렇게 비참한 일일거냐고.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당신이 차라리 제보를 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당신이 귄민아에게 칼을 찔러넣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박무성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특임수사팀은 결성 될 일도 없었을 거다. 자신은 황시목 검사라는 인간을 알지 못 했을테고, 윤세원 과장이라는 사람에게 살갑게 웃어줄 이유도 없었을 터였는데. 영은수 검사는 살해당할 이유가 없어 살았을 것이며 자신은 아마 특임 수사팀의 조사가 아닌 다른 현장을 바쁘게 뛰었겠지. 만약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환상을 그려보다가 이내 지웠다. 정말로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왜 역사학자들이 만약이라는 가정을 싫어한다는 말이 떠도는지 어렴풋이 짐작갈만큼.
정처없는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내 돌아오고야 만다. 그리운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곳을 향해, 저도 모르게. 복도는 어두웠다. 야근을 끝내고 막 퇴근하는 팀원들이 문고리를 돌려 떠나가는 것을 보며 잠시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 그들이 나서는 공간은 한때 여진을 비롯한 특임팀이 근무를 했던 곳이었다.
멀어져가는 것을 확인한 후 불이 꺼진 사무실의 문을 연다. 아직 돌려주지 않았던 사무실의 열쇠가 쉽게 문을 열었다. 문을 닫자 어두워진 사무실의 불을 켜고, 슬금슬금 책상을 만졌다. 처음은 황시목, 그 다음은 장건, 실무관님, 두서없는 손놀림이 이어졌다. 계속해서 차례대로 자리를 더듬어보던 여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 말 없는 한숨이 입술을 이그러뜨렸다. 미간이 좁아진다. 눈물이 고인다. 책상 위의 손을 말없이 우그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왜, 목 끝까지 치민 말을 다시 삼켰다. 묻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시목이 취조한 범인의 녹취록을 낱낱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 앞에서 힘 없이 무너지는, 더없이 공정해야 했던 수사기관이 벌여놓은 짓들. 정말 나쁜 놈들이었다. 더불어 가장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은 아마 세원이 호명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일 거였다. 높은 사람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이미 중요치 않았다. 만약 자신이 알았다면. 불 속에서 서서히 타들어갔을 어린 아이를 눈 앞에 그리며 입술을 깨물었었다.
그렇지만 왜 그랬어요. 2년만에 숨을 쉬는 것 같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에서 불길이 솟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자는 검사였다. 불의에 맞서 싸워야 했을 수사 기관의 일원. 사람을 죽였으면서 숨을 쉬는 것 같았었다고 고백한. 한때 그를 사랑했었다. 이 과정은 그를 가슴 속에서 뽑아내는 일련의 절찬인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에게 더불어 주어진 형벌이란 말인가?
왜 견디지 못 했어. 소리내어 원망했다. 나는 왜 이 사실을 견딜 수가 없는걸까. 만약 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막을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모두가 조금만 더 공정했더라면, 누군가 목소리를 내어 짖었더라면, 어떤 점이 바뀌었을까.
더듬은 자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익숙한 체온이 전해져 올 것만 같았는데. 세원의 셔츠 깃 자락이 스칠 것만 같은 그런 자리인데. 금방이라도 특임팀이 모여앉아 사건에 관해 논하며 웃을 것 같은. 의자를 밀어내고 그 위에 앉는다. 등잔 밑의 어둠이 내내 곁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앉아. 자신은 그런 그를 향해 웃어 주었고. 차라리 그가 없었으면 했다. 차라리 그 모든 일이 허상이고 자신의 환청이었다면 이만큼 아프진 않았겠지. 이름뿐인 사랑이 끝을 고할 일도 없었다. 사랑하던 상대에 대한 깊은 모멸감이, 그 더러운 감각이 여진을 파도처럼 덮치고 있다.
착잡한 마음이 듦에도 잠은 왜 그리 쏟아지는지, 천장은 왜 그렇게 낮았는지. 의문을 구할 틈도 없이 여진은 제 무릎을 그러모아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묻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달갑지 않은 잠이 꾸벅 꾸벅 쏟아진다.
◆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 윤 과장이 울고 있었다. 자신은 음영처럼 깊이 주변에 가라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주변에 메아리처럼 울릴 때, 그에게 말을 걸 심산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러다 일순 발걸음을 멈춘 것은 그가 새카만 형체를 안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아이의 형상에 가까웠던 형체는 이윽고 까맣게 바스라졌다.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는 것을 향해 손을 뻗어가며 목놓아 우는 윤 과장의 모습이, 처절하게 시선을 찢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도망쳐야 해.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가는 자신의 음성이 어지러웠다. 우리나라에 억울하게 자식 잃은 부모, 너무 많아. 그 사람들이 다 칼부림 하나? 빠져나오려 뒤를 돌아서는데, 자신을 잡아 세운 것은 세원의 약한 목소리였다.
경위 님 말이 맞습니다.
고개를 돌렸다. 돌아다본 세원의 눈이 너무나도 깊고 슬프게 무르익어 있었다. 놀란 여진의 움직임이 멎었다. 세원의 뺨을 그은 눈물이 고요히 흘러내린다. 이윽고 바닥을 친 세원의 몸뚱아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떻게든 제대로 극복하려는 사람들, 도매금으로 넘길 일도, 찌를 일도 없었을텐데.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너무 차가웠습니다. 문을 쾅 닫고 스쳐지나간 당신의 발자취가 공허했어요. 2년간 나의 가슴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차라리.
고개를 숙인 세원의 등이 풀썩 무너졌다. 이윽고 시야가 부옇게 번져나갔다. 허공에 뻗은 손이 세원에게 채 닿기도 전에, 장면이 온통 희게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깔리는 어둠, 그 속에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아 정신이 혼곤하고 멍했다. 방금까지 들었던 세원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그 말이, 선명한데, 사방은 온통 심연이었다. 뒤이어 그 어둠 속을 찢고 달려오다 뒤집히는 버스가 보였다. 그 자리에서 두어번 회전하다, 울려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그들을 구하려고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벽이 앞을 가로막은 탓에. 쾅쾅, 그것을 정신없이 두들기는 제 주먹이 붉었다.
눈물이 났다. 드문드문 보이는 아이들의 눈빛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지척에 울리는 울음소리. 엄마와 아빠, 누나와 언니, 오빠와 형, 동생, 친구.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그들이 찾는 사람도 참 다양했다. 그 울부짖음이 선명하기만 한데, 낯선 손이 여진을 붙잡고 끌어냈다. 안 돼, 잠시만요! 저 애들을, 구해야… 허겁지겁 울며 소리친다. 상대를 향해 발길질도 해보고 주먹도 내리질러보았다. 하지만 말이 없는 심연은 그녀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만 길게 끌어내며 꾸역 꾸역 아이들의 시야를 벗어났다.
정신이 들자 잠깐 사이에 부품이 고장난 모니터처럼 시야가 혼잡했다. 달리고 싶었으나 몸이 마냥 무겁기만 하다. 심하게 주변이 어두웠던 탓도 있을거다. 상기한다. 그녀는 정지된 화면을 따라 더듬더듬 몸을 움직이며 자신이 끌려온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어둠 속을 무작정 걸어가며 무조건 헤매었다. 도와야 해. 머리속을 가득 메운 그 상념을 뒤집은 것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온,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였다. 간헐적인 소음. 그에 반응해 어둠 속을 뚫어보며 조용히 멈춘다. 동시에 울음이 멎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아니, 이것은 저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소리는 낮았고,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들추는 소음에 가까웠다. 불길하고도 불쾌한 예감이 따갑게 목전을 스쳤다.
소음은 꼭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여진 씨. 하는 말처럼 들렸던 것도 말이 될만큼. 어딘지 윤 과장과 닮은 그런 소음. 소리의 출처를 찾아 어둠을 헤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
꿈이었나. 고개를 든 여진의 등이 축축했다. 밤새 소나기처럼 흘린 땀이었다. 기분 나쁜… 꿈. 자신은 무얼 원하고 있었던건가. 꿈의 기억은 온통 흐리고 어두웠다. 그러나 내용이야 어쨌건 불길한 전조였음을 안다. 형사로서의 직감도, 제 볼에 잔뜩 번진 눈물도. 그 모두가 더불어 정황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으니까.
비틀 비틀 일어나는데, 주위가 어두웠다. 분명 사무실 불을 켜뒀을텐데. 스위치를 찾아 뻗은 손에 느껴지는 이질감.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가슴이 덜컥 무너졌다. 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분명 자신이 잠들었던 곳은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허공처럼 끝없이 펼쳐진 어둠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보는데, 난데없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은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 헌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누군가가 어둠 속을 빠져나왔다. 남자였다. 그리고 한여진이 근래에 가장 익숙하게 익힌 얼굴이기도 했다. 남자의 이름을 조용히 짓씹어본다.
박무성.
가슴 속이 삐걱거렸다. 이미 죽었을 터인 그가 어째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며 조용히 뒷걸음쳐 물러나니 이미 죽었던 남자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저쪽을 향했다.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도 하더니, 돌아선다. 그리고 누군가가 느리게 걸어 나왔다. 어두운 그림자가 날카로운 것을 든다. 아, 입을 틀어막던 여진이 총알처럼 몸을 날려 그를 잡았다. 남청색의 작업복이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동시에 소리 없는 비명도 함께 터져나온다. 윤 과장님……. 하지 말아요. 하지…마. 하지마! 허리에 매달려 힘껏 잡아당긴다. 박무성을 찌르려던 남자가 크게 휘두르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남자는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었다. 박무성이 이쪽을 크게 돌아다본 순간, 그는 거세게 여진을 떠밀었다.
떠밀린 여진의 손가락 끝에서 그가 입은 상의가 부욱, 찢겨나갔다. 동시에 살을 찌르는 소음도 불쾌하게 울어대고 있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딱 세 번을 베어내자 피가 온 사방에 튀고 있었다. 시목이 말로서 수 차례 재현했던 그 장면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펼쳐졌다. 안 된다고. 하지 말라고, 고함을 치던 여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
정신을 차리니 이제 여진은 다른 곳에 와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충격과 어지러움에 헛웃음이 맥없이 흩어졌다. 윤 과장…. 그건 뭐였을까. 삽시간에 바뀐 시야. 주변은 이제 골목이다. 그리고 낯선 소음하며 밤 하늘 속으로 날아드는 들새하며. 그래, 그리고 어둠을 선연히 밝히며 다가오는 무언가에 여진은 급히 어느 집의 문에 바싹 붙어서서 몸을 숨겼다.
어둠으로 얼룩진 좁은 골목.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천천히 미끌어져 오는 승용차. 이윽고 익숙한 얼굴이 차에서 내렸다. 숨을 죽여 기다리는 동안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떨고 있던 형체가 어깨를 오므렸다. 겁먹은 동물 새끼 같았다. 그만큼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내린 자를 날카롭게 주시한다. 차문을 밀쳐내고 나온 남자는 뭐라고 말을 했다. 그 소리가 멀었고, 어둠은 입 주변을 떠돌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상대에게 다가선다. 고개를 숙인다. 일순 여진은 그것이 이창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아마 상대는 세원일까. 겁먹은 것처럼 작아져있는 세원의 등이 불시에 떨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 유독 무겁고 낮았다. 둘둘 말린 뭉치를 세원에게서 가져가자 세원은 머뭇머뭇 여진이 있는 곳을 향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여진은 흡 숨을 멈췄다.
세원의 눈이 여진의 시선과 정확하게 마주쳤다. 마치 여진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미리부터 알았던 것처럼. 창준이 이맛살을 구기며 뭐하냐고 묻는 듯 하다. 그제서야 세원이 그의 손길에 이끌려 차 속으로 들어가는데, 여진은 차마 발걸음도 옮기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붙박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어두운 공간. 창준에게 예, 하고 낮게 읊조리던 목소리를 끝으로 여진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세원은 다른 실수를 또 반복하고 있구나. 시간을 거슬러오른 그들은 거꾸로 사건을 되짚고 있었구나. 멀리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온다.
여진은 울고 있는 세원에게 다가갔다.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술을 여는 대신 여진은 세원을 힘껏 끌어안았다. 놀란 세원의 눈이 둥그렇게 열린 채로 서서히 일렁인다. 오래 어둠 속을 구른 그의 몸이 찼다.
어떡하면 좋죠, 경위님.
멈출 수가 없어요.
멈추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여진의 양심이었다. 가슴이 찢어질지언정 그녀의 양심은 동정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당신은 죄인이라던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던가 하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목숨을 빼앗고 뺏겼다. 시목이 들려주었던 녹취록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던 한 구절이 유난히 섬뜩하고 선연했다. 권한이 있는 사람들은 뭘 했습니까. 그 속에 일말 죄악감이 사라졌던 탓에. 그래서 여진은 힘을 주어 세원을 안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윤 과장님.”
“….”
“죗값을 치러요.”
일련의 과정을 보고부터 말투에 더 공고한 힘이 실렸다. 슬픈 마음은 꺾이지 않았지만.
“경위님. 아니, 여진씨.”
차라리 당신을 마음에 품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엇갈릴 줄 알았다면. 여진의 어깨에 기댄 세원의 얼굴이 눈물로 차갑고 온기로 뜨거웠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닌데. 우린 그저 서로에게 이방인으로 남았어야 했다. 다시는, 절대 교차하지 못할 길을 걸을 줄 알았더라면.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은 서로 흘러흘러 스쳐가야만 하는 존재니까. 시간을 거슬러 되돌린대도 윤 과장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며, 여진은 기어이 그런 그를 붙잡아 감옥으로 넣었을 테지.
“가요.”
기다려주지 않을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여진은 벌떡 일어섰다. 불이 꺼진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여진은 느리게 두 눈을 깜박이다, 짐을 챙겼다. 가슴은 여전히 삐걱이고 시침 소리는 요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