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계속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습관처럼 최근 통화 기록을 눌러 본다. 차장님. 차장님. 차장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재중 전화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보낸 문자의 기록밖에 보이지 않는다. 화면 속에선 일정한 방향의 화살표들이 모여 나를 내보내기 위해 손짓한다. 춥다. 괜히 보일러 온도를 더 높여본다. 바닥에선 훈기가 올라오지만 여전히 시리다.
처음으로 겨울에 가져본 감흥은 온정이었다. 계절의 변화를 인식하지 않고 살았던 지난 서른 몇 해와 달리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사계로 가득했다. 계절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할 때면 당신은 나를 제동하고 고개를 안아 돌려 멀리 숲을 보게 했다. 달력을 본다. 12라는 숫자를 보면 이제는 당신이 소개해준 학림의 커피가, 고즈넉한 낭만파 음악들이, 내게 선물해준 목도리가 떠오른다. 이유 있는 연상들은 뜻하지 않게 내 남은 평생과 함께 할 것이 분명했다. 나 혼자서는 겨울에 의미를 부여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신의 다정함을 언급하면 사람들은 웃곤 했다. 물론 당신이 겨울을 닮았다는 말에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당신을 보고 겨울을 떠올렸지만 내 속의 겨울이 유독 아름다웠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리 따스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랬듯 나 역시 당신이 서늘하고 시린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혹은 나 혼자서라도 첫 순간부터 당신의 따스함을 눈치 챘을지도 몰랐다. 처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에, 그 끝에 기억에 새겨진 것은 따스함이기를 바랐다.
뉴스에서는 예년보다 온화한 크리스마스를 맞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집 밖을 나서보면 아직 12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코끝을 얼리는 추위가 나를 덮친다. 마른 공기는 살결에 달라붙어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을 떼어간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첫 겨울은 이렇다. 이제야 사람들이 말하는 당신의 겨울이 피부를 가격한다.
당신은 내게 바쁘다고 말한다. 연락하는 내게 용건이 있느냐고 묻는다. 작년 겨울에도 이런 말을 했던가? 고개를 저으려는, 사실을 보려는 눈을 감긴다. 하지만 감겨도, 감겨도, 눈은 바락바락 힘을 주어 다시 열린다. 눈을 뜨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보인다. 당신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 한 마디면 우리의 관계와 당신의 바쁨과 나의 추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아, 더 이상 나를 볼 땐 짓지 않는 미소 또한 이것이면 충분했다. 존재로서 이미 증명이 완료된 가설이었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것이 정답을 소리치고 있는 보람 없는 연구였다. 하지만 연구자 된 도리로서 마지막까지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지난 몇 년간 쌓여 단단해진 습관처럼 크리스마스 일정을 물으면, 당신은 고민 없이 나를 만날 것이라 말한다. 오늘의 나는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는 지극히 당연한 데이트가 반갑지 않았다. 습관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의 의식 작용보다 동물적인 반사에 더 가까웠다. 계획이 만들어지고 행동으로 실천되는 과정에 있어 사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위 하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크리스마스의 아침이 밝는다. 예측보다 쌀쌀하리란 기상 예보를 듣고 집어 들었던 목도리를 당신이 사 주던 순간이 생각나 내려놓는다. 오늘의 날씨를 알기 위해 켠 라디오가 캐럴을 들려주고 있다. 여전한 음악은 작년 오늘을 떠올리게 한다. 온화할 것이라는 예보를 듣고 목도리를 다시 걸어 두었다가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목에 둘렀던 작년과, 올해는 달랐다. 대신 깃이 긴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당신이 부재한 목을 감추고 싶었다.
우습게도 우리는 자주 대학로에서 만나곤 했다. 정작 대학 시절엔 찾아본 적 없는 번잡한 곳을 그의 손에 이끌려 처음 거닐었었다. 대학로에 도착하자 처음의 우리를 닮은 연인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탈피했다. 익숙하게 만나, 만나면 손을 잡고, 얼마쯤 지나면 조용한 거리에서 입술을 맞춘다. 오랜만에 시선을 맞춘 오늘의 우리는 대화가 적다. 눈보다도 입을 맞췄다. 뺨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 위를 두드리면 당신은 그제야 다정한 입술을 떼어냈다.
“차장님.”
당신은 음성 대신 눈빛으로 왜 불렀느냐고 묻는다. 무채색의 짙은 시선이 겨울 속에서 빛났다. 얼굴을 숙여 나를 바라보고선 고개를 옆으로 까딱여 나의 말을 기다린다. 당신은 언제나처럼 다정했지만 사랑이 아님을 알았다. 당신은 모두에게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었고, 당신과 나 사이엔 그 어떤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 온몸의 관을 타고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찬 공기가 스며든다. 목을 울려보면 그것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조차 냉각되어 나는 그만 춥게 말했다.
“그만 만나요. 우리.”
“시목아.”
당신은 언짢아 보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스듬하게, 하지만 올곧게 서 있다. 당신이 손을 가져다 대면 잘 손질된 머리카락은 금세 헝클어져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어지럽게 떨어져 나오는 것들이 당신이 전하려는 문장들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목소리를 더 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입을 달싹이는 당신을 보고는 끊임없이 속 안의 무언가를 뱉어내 그를 쳐냈다.
“차장님 바쁘시잖습니까, 연락하기도 힘드실 정도로. 잘 웃으시지도 않으시고요.”
원인을 무시한 채 현상들을 나열한다. 이것들을 들은 그는 붉게 죽은 벽돌 바닥을 바라본다. 호흡할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져 당신이 내쉬는 깊은 숨들을 내가 곧장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출발이 당신이었던 만큼 당신 역시 권태라는 원인을, 나보다 잘, 알 게 분명했다. 그는 손가락을 말아 세게 주먹을 쥔다. 점점 당신의 손가락에 힘이 빠지고 주먹은 풀리다 말아 손가락만 접힌 채로 굽어 있다. 이내 힘없이 손가락이 전부 풀리고 시선은 다시 위로 들린다.
“피곤해 보이네.”
“가 볼게요.”
생각 끝에 나온 그의 말은 가벼웠고, 그랬기에 나를 잡아당기는 힘은 충분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발걸음을 뗀다. 그는 시목아, 하고 나를 부른다. 다급한 목소리가 꼭 팔을 뻗어 어깨를 잡는 것처럼 가려던 몸을 돌이켜 세운다. 뒤돌아보며 그에게 기회를 베푸는 척했지만 나 역시 망설일 마지막 기회가 간절했다. 무슨 말이더라도 당신의 목소리만으로 나는 망설이고 싶었다.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요?”
그는 꼭 소설처럼 말한다. 유약해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마음을 묻는다. 억지로 직감을 비집고 기회를 만들어냈다. 사랑하니까, 라고 말해주면 나는 당신 품에 안길게요. 간절함을 담아 당신을 올려다본다. 그는 온화한 착잡함을 긴 숨에 담아 뱉는다. 당신은 입을 열고,
“알잖니.”
하고 말한다. 그의 진심을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가 세 음절에 무슨 말을 치환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항상 거짓에 약했고 오늘 또한 그랬기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느리게 두 번 고개를 끄덕인다. 음성의 비애감에서 잔여물이 보인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흐려졌다. 나를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는 분명 비어 있지 않았다. 남은 사랑의 찌꺼기와 지난 시간의 퇴적물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그 모두를 읽을 수 있었고,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권태 또한 아는 걸요.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당신은 팔을 뻗어 나를 붙잡지 않는다. 마주친 시선이 애처로웠다. 슬픔을 표현해 예의를 차리는 기분이었다. 할 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적막한 겨울 안에는 속삭임조차 없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고개를 돌리는 마지막까지 시야에 당신을 담는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차올랐다. 당신의 얼굴이 온전히 담기다가 미련 남은 눈 끝으로만 당신을 보게 되는 순간. 영원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깊게 남을 찰나가 되리란 예상과 달리 매 순간이 자꾸만 흐려져 간다. 다시 한번 그 순간을 눌러 담고 싶었지만 이미 고개는 돌려진 채였다.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발을 뗀다.
등 뒤의 당신이 보이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거리를 걷는다. 여전히 음악이 울려 퍼지고 겨울만이 드리우는 꿈같은 낭만이 발밑에 깔려 있었다. 애써 헤치지 않아도 무리들은 자석처럼 갈라지고 다시 붙어, 번잡한 인파 속에서 행로가 부딪히는 이 하나 없는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구역질처럼 허전함이 차올라 조금도 빈 자리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당신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