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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의 안락을 고취鼓吹한다.

 

빈약한 반역을 무릅쓰고 고초苦楚를 딛는다. 모든 것의 시초가 그러하였다. 시외하는 것, 그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시목은 그렇게 느껴지는 것들을 모두 미지의 것으로 분류했다. 미약한 고통의 근원은 당도하지 않을 곳에 존재했고 곧 이탈한다. 유류의 유실을 겪으며 하나씩 판정된다. 작열灼熱하는 태양이 분주奔走한다.

 

안식이 될 수 없다. 조명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태초에 피었던 꽃도 지지 않았다. 이전까지 모든 것들은 스스로 묵살했으며 전과를 묻지 않았다. 정안正顔을 사랑했고 감정의 숨을 끊었다. 약육강식의 생존방식에 이의는 없었으며 관습처럼 전해졌다. 그렇게 이방인은 겨우 혼만 생존한다.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척도는 살의로 정해졌다.

 

죽은 내면의 살의가 아직도 기척을 보인다. 죽은 줄 알았는데. 세상에서 제일 다가가기 쉬우면서도 헤어나오기 힘든 것이 무의식이고 내면이다. 눈만 감으면 고차원의 세계가 곧 펼쳐지고 자신은 세차게 던져진다.

 

아프지 않기로 한다. 숨을 미약하게 쉬어 자신을 숨겨낸다. 사랑이 그의 종말로써 함축되기를 바란다. 자책으로 지탱된 자신이 여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혼이 감히 육체를 욕심 하기를 바란다.

 

 

 

 "아침이 올 때까지는 손만 잡아요, 나머지는 저녁."

 

치장된 부유한 향이 공기에 안착한다. 하류의 수세처럼 평온한 안색을 한 여자에 의해 손과 손이 맞물린다. 수레바퀴가 천천히 돌아간다. 단단히 엮어진 마디들이 결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직 밤이 아니라서 죄송하네요. 불을 끄면 밤이야.

 

백팩을 내려놓고 이어진 신발을 벗는 소리, 외투와 소파가 마찰한 소리. 실내용 슬리퍼가 발걸음에 의해 끌리는 소리. 아직 전등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사람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어둠에 적응되기 위해 점멸된 시야가 곧 밝게 채워진다.

 

 "밤이 좋은 거야?"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요. 선배랑 있으면 이상하게, 밤이 좋아져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뭐든, 할 수 있다고.

 

 "네."

 

  지금 제 앞에 서 계신 것도 그 의미 아니에요?

  응.

 

셔츠의 단추가 풀리는 소리, 머릿결을 단단히 옭아매던 머리끈이 풀어지는 소리. 그리고 빛이 차단되는 소리. 그들이 엉겨 붙는, 고요한 공기들의 움직임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느릿하고 흐렸다.

 

 

 

 

유달리 새벽의 채도가 옅게 느껴졌다.

 

시각이 6시를 넘어갈 무렵에 그들은 함께 눈을 떴다. 보드라운 살이 이불에 덮여 알맞은 온도에 정착해있다. 속눈썹이 가지런하다. 서로의 시야에서 그들은 조용히 진행되던 한 우주의 폭발을 목격했다. 그리고 다시 생성과 소멸을 거쳐 무의 상태로 거듭나는 것 또한 목격했다. 그들은 스스로 옅어지길 바란다. 별의 군집들처럼 숨어도 모를 정도로 옅어지기를, 그렇게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덕분에 잘 잤어요. 곧은 자세로 자서 그런지, 허리가 뻐근하기도 하구."

 "스트레칭 해."

  도와줘? 

  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은수가 허리를 굽혀나가는 동시에 시목의 팔도 천천히 내려간다. 아, 그만요. 아파요! 일부러 그러는 거죠.

 

  어.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하겠다고.

 

 "밥 먹어요. 배고프겠다."

 

자연스레 화제를 돌린 은수가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서나간다. 시목도 뒤따라 나가며 열렸던 방문을 닫는다. 침대의 커버는 여전히 흐트러져있고 은수의 재킷은 시목의 의자 헤드에 보기 좋게 걸려있다. 익숙한 배경처럼 보인 방의 문을, 닫는다.

 

 

 

 

시목은 한참을 앓았다. 곳곳에서 열병이 피어났고 의식이 무지가 될 때까지 괴로워했다. 은수의 빈자리는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이질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신념이 무너진 지 너무도 오래되었고 그녀의 모든 상처가 시목에게로 이미 전염된 것 같았다. 찔리지 않은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녔다. 그래서 화이트아웃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계속해서 절규했다. 그런데도 떠올려지는 모습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뒷모습뿐이었다. 불쌍한 혼을 달래지 못한 채 그의 어딘가는 천천히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왜 자신은 살았는지, 끝없이 고뇌했다.

 

은수가 죽기 직전 왜 자신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실낱같은 희망. 그것이 시목이었을까. 그녀에게 이름을 제대로 불린 적이 없었다. 황시목. 이 세 글자가 원망스러워진다, 겨우 세 글자로.

 

사고는 예견되지 않았다.

 

동행은 늘 있는 일이었으며 여전히 어제와 내일과 같은 밤이었고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시목은 운전석에, 은수는 조수석에 앉았고 평소처럼, 은수가 이야기하면 시목은 묵묵히 들어주는 쪽이었다. 라디오는 틀지 않았다. 은수의 목소리가 먹혀들어 가니까. 그녀의 온전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고는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차선에서 달리던 차가 역주행을 하며 시목의 차를 들이받았다. 정확히 은수가 있는 쪽으로 들이받았으며 시목의 바로 앞에서 제동되었다. 시목은 전복되는 순간의 은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마지막 눈짓은 오로지 시목에게 향해있었다.

 

그녀는 분명 살려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렇지만 시목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리창의 파편이 손에 찍히더라도 은수를 최대한 제 쪽으로 붙여보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사람, 사람이 다쳤습니다. 사람, 사람이...

 

 

   세찬 바람이 소나기에 묻힌다. 한강에 비친 황혼의 빛으로 물결이 울긋불긋하다. 빗소리가 처절하게 울려온다. 시목은 지금 아무 표정도 짓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제 옆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행인, 뛰어가는 아이, 우산을 쓰고 있는 누군가의 행적들이 시목의 옆을 빠르게 스쳐가고 있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다. 그녀 또한 말 없이 시목의 옆을 스쳐 지났을 것이다. 슬프게 웃으며 시목을 한 번 바라보았을 것이다. 마지막에 잡지 못했던 손을 매만지며 웃음을 지우고 소낙비처럼 울어댈 것이다. 은수는 그렇게 환하게 졌을 것이다.

 

시목은, 환하지 못하고 진다. 밟힌 초 草들처럼 기력을 모두 잃었다. 일상에 부류하던 향기들을 걷어내지 못하고 겨우, 살아내고 있다. 이미 망가진 생에서도, 사회에서도, 사랑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어 갈 것이다. 구휼한 생의 구원을 바라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픈 것이 덧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제외된 낙오자처럼, 그는 쓸쓸히 엇나갈 것이다. 이방인의 체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는 울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 이창준 앞에서 울었을 때. 진짜 자존심 상했거든요. 왜 눈물이 나지.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너무 분해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어요. 선배, 그때 계셨으면 뭐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왜 은수 울리냐, 이런 것까진 바라진 않으니까요. 하긴, 나 같은 게 뭐라고 걱정하게 하겠어요."

 "너 같은 건 걱정도 받으면 안 되는 건가?"

 

  네?

 

 "너 같은 게 뭔데. 그냥 사람이잖아?"

 "그렇기야 하죠. 근데, 제가 자격이 있는진 잘 모르겠어요. 내가 과연 진심을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거든요."

 "그래도 돼."

 

  어떤 근거로요?

  ...

 

 "장난이에요. 말이라도 감사하네요. 저 여기서 내려주시면 돼요. 조심히 들어가시구요. 연락 꼭 하셔야 해요."

 

  잔다고 또 까먹으심 저 삐져요.

  응. 조심히 가.

  네,

  ...

  ...

  사랑해요.

  ...

 

 "그럴게."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평소 같았으면 켜지도 않았을 라디오를, 이유는 모르겠지만 켰다. 적적한 공기가 처음으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4차선 도로를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시속 100km를 넘어가고 있다. 시목의 머리칼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흩날린다. 낮은 온도의 기류가 차내를 에워싼다. 기온이 벌써 17도까지 내려갔다. 봄은 물론 여름까지 지나버렸다. 벌써 계절의 시간은 가을을 가리키고 있다. 겨울을 기다리는 새하얀 가을. 푸르지 못하고 새하얗게 굳어버린 가을이 되어 자신을 사라지게 할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시목은 끊었던 감정의 숨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굳어버린 은수의 손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피폐한 삶에 놓인 작은 나루터의 정착한 시목은 겨우내 웃어 보일 것이다. 하얗게 웃어 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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