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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여덟 시를 넘겨 로마 다빈치 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온 시목의 모습은 피곤하다기보단 힘겨워 보였다. 그에게서 소형 캐리어를 건네받은 창준은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내내 한쪽이 터진 그의 입술과 왼쪽 관자놀이서부터 뺨까지 사선으로 길게 그어진 상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깊이는 얕았지만 창준은 그 모양이 퍽 불쾌했다.

 

 “비행기에서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시목은 그의 표정을 본체만체하며 따라 걸었다. 오랜만의 재회인데도 슬쩍 쥐어 본 시목의 어깨가 두어 달 전보다 얄팍해 창준은 차마 웃어 줄 수가 없었다.

 

로마에서 지낸 지 보름가량 되었을 창준은 교통표지판 정도는 이탈리아어로도 곧잘 읽었다. 고속도로를 약 삼십 킬로미터를 달려 로마 근교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장은 스무 개가 채 되지 않았다. 얼굴은 왜 그러냐는 창준의 질문은 막판에 나왔는데 창준이 무심한 체를 한 만큼 시목의 답변은 퍽 불친절했다. “맞았어요.”

 

서부지검에서 새로 부장 직함을 단 창준이 이탈리아로 한 달간의―사실상 독려 휴가였던―연수를 떠나던 날 시목은 공항에 오지 않았다. 그때는 4월 중순이었다. 시목이 동부지검으로 발령받은 지 두 달가량 된 시점이었다. 게이트 앞에서 보딩을 기다리던 창준은 시목의 짤막한 배웅 메시지를 받자마자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긴 대화 없이 전화는 금방 끊어졌지만 창준은 왜인지 울적하게 들렸던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가 한동안 신경 쓰였다. 그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더라면 지금쯤 저 얼굴은 말끔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와, 휴가라도 냈어?’

엊그제 통화에서 시목은 로마행 티켓을 끊었다는 얘길 전하면서 그런 셈이죠, 하고 대답을 흘렸다. 답잖게 웬 휴가야, 피곤하게들 괴롭히나 보군. 차라리 그때라도 그렇게 다 말했더라면 지금 드는 미안한 감정은 좀 덜어졌을까. 창준은 그런 생각에 물들어 신호등이 바뀐 뒤에도 한동안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다.

 

 “혹시 배고프니?”

 

그는 조수석 쪽을 힐끗거렸다. 그의 눈에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잠든 시목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창준은 잠자코 차를 몰았다. 까만색 피아트가 협소한 저층 아파트의 입구 앞에 섰을 때는 비가 많이 내려 차량 와이퍼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시동을 끄자 엔진음이 지워지면서 천장과 유리창을 때리는 두터운 빗소리가 차체를 무섭게 뚫고 들어왔다.

 

먼저 시목을 채근하고 뒤따라 씻은 창준은 나오면서 대충 옷을 벗고 침대에 쓰러져 있는 조그만 사내를 보고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어떡하면 저렇게 뻔뻔해. 창준은 시목이 수원지검에 내려갔던 이후로도 가끔 몸에, 거의 항상 마음에 생채기를 달고 그를 찾아왔던 몇 번의 역사를 떠올렸다. 그 시절 그의 사무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나이 어린 후배는 이제 머나먼 이국의 허름한 임대 아파트에까지 저를 쫓아왔다. 그러자 불현듯 창준은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등을 매만지고 싶어졌다. 아. 창준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미쳤지, 내가.

 

 

 

 

창준은 시목이 갓 구운 빵 냄새를 맡고 일어날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를 깨운 것은 창준의 그림자였다. 빵 냄새나 새 소리보다 눈앞을 오가는 그림자가 신경 쓰일 정도로 이탈리아의 아침은 눈부시게 환했다. 시목이 세수를 하러 사라진 동안 창준은 크래프트지(紙) 봉투를 바스락거리며 방금 사 온 빵을 접시에 옮겨 담았다. 3층 아래 창밖으로 차들이 하나 둘 지나갔다.

 

 “출근 안 하세요?”

 

창준이 잼을 덜어 내는 동안 시목은 의자를 빼고 식탁에 팔을 올렸다. 안 한다는 대답을 하는 게 뭐가 그리도 쑥스러웠는지 창준은 빵이 든 접시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흉 지겠다.”

 

시목이 잼을 바르는 동안 창준은 결국 다시 한 번 상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동향인 아파트, 대낮처럼 밝은 거실에 마주 앉은 상황에서 시선이 자꾸 그 입술과 이마께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안타까움이 담긴 그의 말에도 시목은 별말 없이 손등으로 상처를 슥 쓸었다. 마치 그럼 뭐 어떠냐는 것처럼. 햇살은 빵가루만 남은 하얀 플레이트 위를 미끄러졌고, 밖을 지나가는 차의 경적 소리가 고요를 깨며 크게 들려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창준이 내린 커피도 다 식어 갈 때쯤 시목은 창준에게 정직 1개월짜리 징계를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창준의 머릿속으로 전화를 걸 만한 동부지검 소속의 동기들 얼굴이 재빨리 지나갔다. 공교롭게도 개중에는 올해 창준이 부장 직함을 달 때 함께 부부장 직함을 단 동기도 끼어 있었다.

 

 “……음.”

 

전화는 관두자. 창준이 입에 머금은 커피에서 쓴 맛이 났다. 어쨌든 정직이라니, 너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겠고. 머그컵을 든 시목의 굴곡진 손등에서 빨갛게 까진 부분이 그의 눈에 띄었다.

 

누구든 그런 상황이라면 기분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어때, 나갈까.”

 

창준은 해외연수 보고서에 들어갈 자료를 이틀 전 대법원에 신청해 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 그쪽까지 나가서 자연스럽게 시내 구경까지 하고 들어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설거지를 하느라 등만 보이는 시목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킬 때 말해 주겠지. 창준도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잠시 후 시목이 창준이 건네주는 수건을 받으면서 슬쩍 입을 열었다.

 

 “귀찮지 않으시다면 나가요.”

 

피가 묻지는 않았는지 흰 수건을 몇 번 뒤적거리는 그의 모습을 창준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대법원에서는 바티칸이 가까웠다. 그 외에도 온갖 관광지가 주변에 산재했다. 시목은 피아트 조수석에 앉아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창준이 건네주고 간 주변 지도를 팔락거렸다. 열어 둔 약간의 창문 틈으로 솜털이 달린 꽃씨 따위가 날아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쳤고 다사로운 햇살이 무릎 위에 들었다. 시목은 뒤로 머리를 기댔다. 창준이 차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지도를 대충 접어놓고 잠들어 있었다. 반사광 때문에 그의 뺨 위로 붉은 빛이 돌았다. 창준은 그 뺨에 자신의 손등을 대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차를 그곳에 두고, 둘은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하늘 끝까지 오를 것 같은 광장 한편의 계단 앞에서 시목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창준이 웃었다.

 

 “나도 올라갈 생각은 없어.”

 

그러나 조금 아쉬움이 남아서 창준은 걸음을 멈추고 계단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때 시목이 그를 부르며 팔을 잡아끌었고, 창준의 뒤편에 있던 것들이 그의 시야 안으로 빙그르르 끌려 들어왔다. 젤라또 가판대의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 간판, 빨갛고 노란 꽃을 파는 커다란 꽃수레. 그러나 그때 창준의 눈에는 그것들이 전부 흑백으로 보였다. 왜인지 그 순간 감각의 일부가 수채구멍으로 물이 빠지듯 그러잡힌 팔 쪽으로 한데 모인 것 같았다.

 

사라졌던 감각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 창준에게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광장 위로 내리쬐는, 꽃도 피우는 5월 정오의 뜨거운 햇살은 소음과 함께 짙어지듯 돌아와 다시 그의 피부를 자극했다. 트레비 분수를 멀찍이서 지나쳐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홧홧했던 창준의 낯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둘은 콜로세움의 허물어진 벽에 잠시 기대어 섰다. 시목의 손에는 꽃수레 주인의 호의로 받은 장미가 한 송이 들려 있었다.

 

 “이쪽 동부지검에서도 부부장님, 아니…… 부장님 성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러나 그때 창준은 그 말보다 장미 줄기의 가시를 계속 문지르는 시목의 손가락이 신경 쓰였다. 관광객들이 두 사람 앞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햇볕은 그저 직사로 계속 내리쬐었다. 이내 더위가 느껴지자 창준은 다시 걷자며 등을 뗐다.

 

노천카페에 앉아 점심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시목은 재킷을 벗고 구겨진 셔츠의 팔을 걷어 올렸다. 창준은 제법 무거웠던 그의 캐리어 안에서 고작 속옷 몇 가지와 여벌 셔츠 한 장, 노트북, 몇 권의 책이 보였던 것을 떠올렸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창준은 별로 숨길 생각이 없었다.

 

 “소파에서 잤으니까.”

 “저를 깨우지 그러셨어요.”

 

그는 대답 대신 찬물을 들이켰다. 어젯밤 창준은 시목의 얼굴이 보이는 쪽 가까이로 소파를 밀었다. 그가 불을 끄고 눕자 순식간에 사방이 아득하고 조용해졌다. 창준은 한동안 낯선 숨소리만 듣고 있다가, 이불 밖으로 나온 시목의 손이 잠결에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 그 바로 앞까지 손을 뻗었다. 아니, 그만두었다. 충동보다는 다정 때문에 생긴 두근거림이 한참 동안 그의 가슴에 머무르다 떠났다.

 

간밤에 침대를 혼자 독차지했던 시목은 여전히 수척해 보였다. 디저트를 먹고 있는 그의 모습은 속에 솜 따위를 꾹꾹 욱여넣은 인형 같았다. 그래서 그 터진 틈새로는 뭐가 많이 드러나 보였다. 삶에 대한 강박과 의무, 그리고―상처로부터 느껴지는―약간의 폭력성과 예민한 단일함. 그러나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식의 유기체보다는 그냥 빈 건물―단단하지만 뚫린 벽으로 바람이 들고, 바람이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빈 건물처럼 보였다. 창준은 방금 다녀온 콜로세움을 떠올렸다. 혹은 그 비슷한, 시절이 지나 사람은 떠나고 그들의 애정이 오로지 규모로만 남은 커다란 흔적들을 떠올렸다. 유적. 결국 사람이 떠난 자리. 창준은 나른한 표정으로 햇살을 받고 있는 시목을 바라보았다. 그는 빈 의자처럼 앉아서 가만히 졸고 있었다. 괜히 이런 마음이 끓는 건 아마 향수병일까, 하고 창준은 독백했다. 나라면 널 떠나지 않겠다는 과대망상은 거기서 온 것일까. 그러나 자신이 로마에서 홀로 지냈던 밤은 고작 보름에 불과했음을 그는 한참 후에 떠올렸다.

 

가게에서 나와 인파 속으로 다시 들어온 두 사람은 걸음을 쪼개어 천천히 걸었다. 볕은 오전 때보다 더 뜨거워졌고 바람은 더 서늘하게 불었다. 시목은 아예 재킷을 들고 걸었다.

 

 “얼마나 더 있다 갈 거니?”

 

그렇게 물으면서도, 창준은 참고 참았던 그 질문을 이제야 던지는 자신의 인내에 적이 놀랐다.

 

 "돌아가는 건 사흘 뒤로 끊어 놨어요."

 

시목은 그런 그를 원망하지도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들이 계속 걸을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길이 복잡해졌다. 근처에 관광지가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럽지만 도발적인 발음의 이탈리아어가 좀 더 가깝게 들려 왔다. 창준은 그 북적이는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이방인답게 계속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 애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나 그 질문은 아무런 소득이 없어서 그는 질문을 조금 바꾸었다. 손을 잡을까. 창준은 문득 그의 이름을 아직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시목아.”

 “네, 걷기 힘드세요?”

 

조금 앞서 걷고 있던 그 수척한 얼굴이 창준을 염려하듯 돌아보았다.

 

창준은 지금까지도 그때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 이마에 키스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주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에 창준의 입맞춤은 이마에서 멈췄다. 시목이 창준의 품을 밀었다.

 

 “부장님.”

 

어느새 비가 내릴 것처럼 흐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목은 들고 있던 재킷을 다시 걸쳤다. 그 다음 말은 좀 더 느리게 흘러나왔다.

 

 "비가 올 것 같죠.”

 

그건 조금 쌀쌀맞은 말투였다. 창준은 어쩐지 더 침착해진 시목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참 나중에 그는 그날 그 자리에 사람이 많았던 게 꽤나 신경 쓰였노라고 창준에게 쭈뼛거리며 말해 주었다.

 

두 사람이 주차장에 덩그마니 남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제와 같은 굵은 빗방울이었다. 문을 닫은 창준이 어깨를 닦으며 시동을 걸려고 할 때 그가 앉은 쪽으로 셔츠를 걷은 시목의 팔이 쭉 뻗어 왔다. 그 손에 그의 옷깃이 한 움큼 잡혔다. 창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목은 그 옷깃을 끌어당기면서, 터진 상처를 비껴 건조하고 짧게 입맞춤을 이었다. 피아트 500의 내부는 이 모든 일이 쉬울 정도로 너무 작았다. 정말이지 너무 작아서 한참이 지나고 난 뒤에야 차의 시동이 켜졌다.

 

길다면 긴 고요가 두 사람 사이를 조용히 지나친 후, 둘은 일단 끼니 때울 것을 사서 집에 들어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오후 다섯 시는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차는 아파트가 있는 방향을 등지고 남서쪽을 향해 달렸다. 로마 시내를 가로지르는 테베레 강이 빗물에 몸이 불어나 시목이 앉은 우측 창 쪽으로 길게 꼬리를 내며 드라이브 중인 둘을 쫓아왔다. 그들이 탄 SP8 지방도로는 테베레 강을 따라 로마에서 사십여 분을 내려가면 지중해와 맞닿은 오스티아 해변을 볼 수 있었다. 빗줄기는 남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비가 그치자 곧 창준의 시야도 다시 뚜렷해졌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부터는 두텁던 구름이 깔끔하게 걷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비에 젖어 채도가 낮아진 주변 아스팔트와 싱싱한 나무 위로 눈이 아플 만큼 쨍한 빛이 쏟아졌다. 태양이 저녁 여덟 시에 지는 도시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꽤 경쾌하면서도 무자비하다. 가까이 보이는 풍광이 다시 또 대낮처럼 환해졌다.

 

어느새 직선으로 뻗은 도로의 끄트머리로 푸른 지중해의 끝자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목은 턱을 괸 모습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부장님 없는 데서 부장님 얘기가 돌았어요.”

 

시목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창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뺨에 생채기가 난 이유를 눈치챘다.

 

 “그래서.” 창준이 물었지만 시목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쳤어?” 시목이 계속 말을 않자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졌다.

 

 “무슨 얘기가 돌았는데.”

 “승진…….”

 “자알한다.”

 

창준이 핸들을 힘주어 쥐는 소리가 들렸다.

 

 “사 년차가 고작 입방아 찧는 일로 개싸움을 해?”

 

창준이 인상을 쓰는 사이 조수석으로부터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게 제 얘기라면 무시했겠죠.”

 

그 말과 동시에 시목이 창문을 조금 내렸다. 달아올랐던 실내 공기가 도로 서늘해졌다.

 

 “죄송합니다.”

 

창준의 끓던 마음이 그 말을 듣자 적이 누그러졌다. 한참 뒤 그가 건넨 말은 목소리가 옅어서 바람 소리에 묻혀 버렸다.

 

 “됐어. 쉬면서 잊어버려.”

해변 입구가 가까워질 때쯤 피아트가 불량한 소리를 내며 덜덜거렸다. 창준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팔을 걷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보닛 안쪽을 뜯어보고 있는 동안 시목은 차에 기대어 도로 아래 해변 너머의 새파란 지중해를 감상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백사장은 비에 젖어 있었지만 바다는 충분히 아름다웠고, 그는 거의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바다 좋아해?”

 

창준은 엔진부의 벨트 결함을 살피면서 말을 붙였다.

 

 “좋아해요.”

 “그럼 실컷 봐. 좀 걸릴 거 같으니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창준의 말대로 보닛 뚜껑은 한참 만에 허공에서 내려왔다. 시목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같은 포즈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을 탁탁 털면서 그 모습을 지나치려던 창준도 보닛 위로 손을 짚은 채 한동안 말을 붙이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때부터 한 시간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면서 둘은 중국어 간판을 달고 있는 골목길 어귀의 리스토란테에 들렀다. 거기서 저녁거리로 포장해 온 볶음국수를 집에 와 열어 보니 양이 제법 많았다. 창준은 찬장에서 오전 식탁에 올라왔던 접시보다 좀 더 큰 것을 꺼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침식사를 할 때보다 좀 더 긴 시간을 마주 앉아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정말이지 식탁은―분명 아침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상체를 숙이면 서로 숨이 맞닿을 정도로 거짓말처럼 좁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식탁에서 부딪친 것은 젓가락뿐이었다. 두 사람 중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함부로 입술을 들이밀지 않았다. 이제 그런 일들은 완전히 나중으로 미뤄졌다―그보다 선행해야 할 일들이 한참 남아 있었으므로.

 

당장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시목은 노트북을 켜고 인천행 티켓을 약 이 주 뒤로 연기했다. 그 예약은 창준의 지도하에 정확히 그의 귀국일과 같은 날로, 그리고 같은 편으로 변경되었다. 사흘 뒤로 예정되어 있었던 작별의 순간이 순식간에 이 주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어떤 일들의 실행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고 그중에서도 일부는 곧장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창준은 씻고 나온 시목에게 서랍에서 꺼낸 커다란 면 셔츠를 잠옷으로 내밀었고, 시목은 책을 읽는 동안 창준이 그의 손등과 뺨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도록 손을 내밀거나 눈을 잠시 감아 주었다.

 

시목은 그날도 침대에 혼자 누웠고 창준은 똑같이 소파를 끌고 와 그 앞에 자리 잡았다. 불을 끄자 어둠 속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둘 중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거나 웃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의 입에서 나올 법한 유치한 질문들이 두 사람의 침묵과 일상을 피해 사라졌다. 이윽고 먼저 잠들어 버린 시목의 얼굴 위로 달빛이 흐릿하게 드는 것을 보면서 창준은 이불을 쥔 그의 손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그 손이 움찔거리며 이불을 놓았다, 다시 쥐었다. 창준은 그의 마른 등을 조금 어루만져 주다가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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